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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ject 과학커뮤니케이션이란? (What's Science Communication?)
    TYPE 과학커뮤니케이션 포럼 강연
    DATE/TIME 2005-09-21 ~ 2005-09-21
    PLACE 포스텍 무은재기념관 501호 (APCTP Headquarters)
    SPEAKER 이덕환 (Dunkwan Lee)
    AFFILIATION 서강대 (Sogang Univ.)

    과학커뮤니케이션이란?

     

    □ 행사 개요
    ◦ 행 사 명 : APCTP 과학 커뮤니케이션 강연/포럼
    ◦ 일    시 : 2005년 9월 21일 오후 7:30
    ◦ 장    소 : 아시아태평양 이론물리 센터 (포항공대 무은재기념관 501호)
    ◦ 대    상 : 과학기술자, 다양한 분야의 오피니언 리더 등 초청자와 소규모 일반인 참가자
    ◦ 참가신청 : 초청 또는 홈페이지를 통한 선착순 참가 신청
    ◦ 주최/주관 : 아시아태평양 이론물리 센터

     

    □ 강연내용

    본래 과학커뮤니케이션(science communication)은 사회에서 과학 지식의 전달 과정을 연구하는 사회과학 분야이다. 구체적으로는 과학기술자들 사이에서의 커뮤니케이션, 과학기술자와 대중과의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과학기술자들과 다른 분야 전문가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과학커뮤니케이션은 과학 지식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등장하게 되었다.
      과학 지식을 개발하고 활용하는 전문가 집단인 과학기술자들도 나름대로의 독특한 정보 교환 수단과 방법을 가지고 있다. 전통적으로는 동료 평가를 거치는 전문 학술지와 학술회의를 비롯한 다양한 대면 접촉이 과학기술자들의 커뮤니케이션 통로였지만, 최근에는 인터넷을 비롯한 새로운 매체의 등장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우리의 경우에는 주로 대중 또는 다른 전문가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커뮤니케이션이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과학기술 분야의 출판, 신문, 방송, 박물관, 축전 등이 중요한 매체이고, 역시 최근에는 인터넷도 새로운 매체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과학커뮤니케이션은 주로 과학 대중화로 알려진 대중의 과학 이해(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의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대중 또는 다른 전문가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커뮤니케이션은 거시적으로는 보건, 의료, 환경, 산업 정책 등을 비롯한 현대 사회의 거의 모든 사회 문제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과학커뮤니케이션은 전문적으로는 사회과학의 일부이지만, 그 내용과 결과가 과학기술계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과학기술계에서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특히 우리 사회의 경우에는 사회과학자들의 현대 과학과 기술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 매우 낮기 때문에 과학커뮤니케이션을 사회과학 분야로만 인식할 수도 없다. 세계적으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STS(Science, Technology, Society)가 우리의 경우에는 지극히 반(反)과학적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 그런 우려가 사실임을 보여준다.
      과학커뮤니케이션이 비교적 낯선 분야이지만, 이미 몇 가지 중요한 과제들을 파악할 수 있다. 어떤 과학 지식을 누구에게, 어떻게, 어떤 수준으로 전달해 줄 것인가와 누가 그런 일을 담당할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과학커뮤니케이션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사회적 논의도 필요하다.
      과학커뮤니케이션의 핵심 내용이 되는 과학 지식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인식의 차이가 존재한다. 과학기술계와 대중 매체들은 주로 ‘첨단 과학’과 ‘신기술’을 알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과연 첨단 과학기술 중심의 과학커뮤니케이션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효율적이고, 과연 바람직 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과학기술자가 과학커뮤니케이션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우리의 경우에는 심각한 사회 문제의 원인이 되고 있는 과학과 기술을 개발한 주체가 과학기술자들이기 때문에 과학커뮤니케이션도 역시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입장에서 과학기술자들이 담당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제1회 과학커뮤니케이션심포지엄, 2005년 2월 3일]

    우리 사회에서 과학커뮤니케이션의 현실

    1. 들어가는 말

       세계적인 냉전 종식과 함께 불어닥친 강력한 세계화의 열풍 속에서 현대 과학과 기술이 우리와 미래 세대의 생존을 보장해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사실은 더욱 확실해지고 있다. 국경 없는 치열한 국제 경쟁의 시대에 우리의 경제력을 지탱해주고, 급속한 노령화에 따른 사회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성장동력은 과학과 기술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우리 정부가 '과학기술중심사회 구축'을 핵심 국정과제로 선택하고, 과학과 기술에 대한 사회적 투자를 적극적으로 확대하기 시작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니다. 최근에 현대 과학과 기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현대 과학과 기술이 비록 풍요로운 삶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것은 사실이지만, 물질 중심의 세계관을 확산시켜 인간성을 말살시켰고, 자연 환경을 극심하게 파괴시킴으로써 오히려 우리 삶의 질을 과거보다 나빠졌다는 주장을 듣게 된 것이 그런 증거가 된다. AIDS와 SARS와 같은 새로운 치명적인 질병이 확산되고, 암, 당뇨, 치매, 비만과 같은 생활 습관병이 확산되고 있는 것도 그런 증거라고 한다. 심지어 과거에 볼 수 없었던 대형 기술적 재난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고, 새로운 신분 차별이 등장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으며, 남아시아의 대형 지진과 해일도 자연을 정복하려는 검은 야심을 가진 인간에 대한 자연의 '응징'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이 우리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우리가 현대 과학과 기술에 대해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비록 우리도 과학과 기술의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현대 과학과 기술은 우리에게 어쩔 수 없이 낯선 외래 문물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본격적인 과학화 운동이 시작된 것은 1930년대였고, 본격적인 사회적 투자가 시작된 것도 1950년대 말이었다. 그렇다고 학교에서의 과학 교육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졌던 것도 아니어서, 우리는 현대 과학과 기술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가져본 적이 없었던 셈이다. 더욱이 최근에는 생명공학의 급속한 발전으로 난해한 종교적, 윤리적, 사회적 문제가 제기됨에 따라 현대 과학과 기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부정적인 인식을 개선하지 못하면, 정부가 추구하는 과학기술중심사회 구축은 공허한 꿈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 전문적이고 능력있는 과학커뮤니케이터가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과학커뮤니케이터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우리 사회에 현대 과학의 본질을 정확하게 인식시킴으로써, 가공할 위험을 동반하게 되는 현대 기술을 현명하게 활용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우리 사회의 과학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문제점을 살펴봄으로써 원활한 과학문화 정착 운동의 기반을 마련해보려고 한다.


    2. 과학커뮤니케이션의 근본적인 문제점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과학커뮤니케이션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전문적이고 능력있는 과학커뮤니케이터를 양성하지 못했던 것과 과학커뮤니케이션의 내용을 합리적으로 선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1) 과학커뮤니케이터

      고도로 발달한 현대의 과학과 기술을 이해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자연에 깊이 감추어진 신비를 밝혀내어 체계적으로 정리한 지식 체계인 과학과 애써 얻어낸 과학 지식을 우리 사회에 유용하게 활용하려는 기술이 쉽지 않은 것은 당연할 일이다. 실제로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과학 지식은 대부분 지난 수백 년 사이에 밝혀진 것들이다. 이번 남아시아 지진의 원인을 체계적으로 설명해주는 '판구조론'(tectonics)이 확실하게 정립된 것도 1960년대 후반이었다. 전문 과학자나 기술자가 되기 위해서 개인적인 능력도 필요하지만, 오랜 기간에 걸친 체계적인 교육이 반드시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 과학과 기술을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지 않은 일반인에게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의 문제도 역시 과학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그런 역할은 거의 전적으로 과학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초중등학교의 교사에게 맡겨져 왔다. 대학의 경우만 하더라도 이공계의 교수가 비이공계의 학생들에게 과학과 기술에 대한 강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과학커뮤니케이터는 초중등학교의 과학 교사였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치열한 대학 입시에 의해 초중등학교의 교육이 극도로 왜곡되면서 과학 교사들을 통한 효율적인 과학커뮤니케이션은 기대하기 어렵게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신문이나 방송 또는 과학저술을 통한 과학커뮤니케이션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던 것도 아니었다. 최근에는 과학과 기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면서 과학기술자들이 스스로 과학커뮤니케이터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과학기술자들이 바로 난해한 과학과 기술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런 주장의 근거인 모양이다. 현대 과학과 기술에 의해서 촉발되었다는 여러 가지 사회 및 환경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들이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입장에서 부정적인 인식을 개선하는 주역이 되어야 한다는 뜻도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모든 면에서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분업의 장점을 존중하고 있다. 그래서 음악의 경우에도 작곡자와 그들의 작품을 해석하여 연주하는 연주가, 그리고 작품과 연주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비평가의 역할은 분명하게 구별되어 있다. 논리적으로는 작품의 의도와 내용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작곡가가 연주는 물론이고 그 해설과 홍보까지 담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진 작곡자에게 연주와 비평의 역할을 기대하지 않음으로써, 작곡자는 더욱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내는 데에만 전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미술이나 문학의 경우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뜻에서 과학기술자에게 과학커뮤니케이터의 역할까지 기대하는 것은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분업을 존중하는 현대 사회의 기본 정신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그 효율성도 지극히 의심된다.

      2) 과학커뮤니케이션의 내용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현대 과학과 기술에 대한 소개는 매우 일방적이었다. 자연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인류의 숭고한 노력인 과학의 본질을 소개하려는 노력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그나마도 몇몇 세계적인 외국 과학자의 업적에 집중되어 왔다. 오히려 우리의 미래 생활을 바꿔놓을 것이라는 첨단 기술에 집착했고, 심지어 현재 일상 생활에서 활용되고 있는 기술조차 제대로 알려주지 못했다. 또한 '우리' 과학기술자의 '세계적 업적'을 홍보하는 데에만 급급했던 것도 심각한 문제였다.
      결국 일반인에게 현대 과학과 기술은 본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과학기술자들만의 잔치'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시켰고, 어느 날 느닷없이 등장해서 우리 생활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정체 불명의 현대 기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확산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우리 과학기술자들에 대한 과장된 업적 홍보는 과학기술자들의 사회적 위상을 높여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주장은 일반인들을 극도로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일반인들에게 쉽게 배우기도 어려운 과학 지식은 그것을 직접 활용할 과학기술자들에게나 필요한 것으로 인식되어 버렸기 때문에 학교에서의 과학 교육도 더욱 비효율적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일반 사회인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커뮤니케이션은 특별한 이유로 관심을 갖게 된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이러한 상황은 복잡한 현대 사회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 인문학자와 사회학자들에게 모든 사회 문제가 이해하기 어려운 현대 과학과 기술에서 비롯되었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기도 했다.

    3. 과학커뮤니케이션의 현실적 문제점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과학커뮤니케이션의 현실적인 문제점들을 분야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과학 교육

      자연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 체계인 과학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은 학교에서의 과학 교육이다. 특히 모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초중등학교에서의 수준 높은 과학 교육은 바람직한 과학 문화 정착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핵심적인 분야이다.
      그러나 대학 입시 과열과 파행적인 교육 정책 탓에 초중등학교의 과학 교육은 지극히 비효율적인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초중등 과학 교육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능력 있는 교사 양성과 재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해 확신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연구 논문'만으로 교수의 업적을 평가하는 제도에서는 사범대학 교수들이 자신들이 본연의 임무가 되어야 할 '어렵고 재미없는' 과학을 '쉽고 재미있고 효율적으로' 가르치는 교수학습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는 현대 과학의 현실을 반영하기 위한 교사의 재교육 시스템도 획기적으로 개선되어야만 한다.
      교육 과정의 개편이나 교과서 집필도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 과목간 형평성만을 강조하는 우리 초중등 교육 과정에서 과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끊임없이 줄어들고 있다. 과학과 기술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정도로 중요하다는 사회의 요구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결국 과학은 사회와 같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고, 학생들이 점수를 얻기 어려운 과학을 외면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다. 현재 교육인적자원부에서 조직되어 작업에 착수한 '교육과정심의회'의 구성을 보아도 그런 사정은 변하지 않았다.
      교육 과정의 구체적인 내용도 현대 사회의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외국의 교육 과정을 짜깁기하여 만든 우리의 교육 과정은 아무리 좋게 평가해도 누더기라고 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그 의미도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창의성 개발을 위한 탐구학습 중심'과 '비디오 시대의 학생에게 필요한 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분위기 탓에 학생은 읽을 수 없고, 교사는 가르칠 수 없는 '요리책' 형식의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과학을 멀리하게 만드는 촉매의 역할을 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갑자기 떠들썩하게 강조되고 있는 '영재 교육'도 과학 교육의 정상화에 저해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결국 과학자가 될 수 있는 '영재'를 제외한 대부분의 학생들에게는 과학을 더욱 멀게 느껴지게 만들어버리는 결과를 낳고 있다. '떠들썩한' 영재 교육보다는 과학이 현대 민주 사회 시민의 필수 상식이라는 사실이 더욱 강조되어야만 한다.
      대학에서의 과학 교육도 부실하기는 마찬가지다. 강제로 시행된 학부제 탓에 이공계 학생들은 졸업 이수 학점의 거의 절반을 비이공계 과목으로 채울 수밖에 없지만, 비이공계 학생들은 여전히 좋은 학점을 받기 어려운 이공계 교양 과목을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이공계 교수들이 비이공계 학생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과목의 개발에 소홀한 탓도 있지만, 활발한 연구 활동을 요구당하고 있는 이공계 교수들의 입장에서는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활동에 노력을 기울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2) 신문과 방송

      우리 사회의 특성상 신문과 방송은 과학커뮤니케이션의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효율적인 수단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IMF 이후로 그나마 존재했던 '과학부'들이 모두 사라졌고, 신문이나 방송에서 과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 이상 줄어들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들어 버렸다. 또한 전문성을 완전히 외면하는 '순환 근무' 덕분에 어느 언론사에서도 과학과 기술을 전문으로 하는 기자를 찾아보기 어렵다.
      과학기술자들이 기자들의 취재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지적은 사실이지만, 분명한 이유가 있다. 고등학교 과학 교과서 수준의 과학 내용도 이해하지 못하는 기자들의 질문에 인내를 가지고 설명을 해주어야 한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얼굴도 모르는 기자가 전화로 '자신은 문과 출신으로 화학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라고 당당하게 밝히는 경험은 결코 쉽게 참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과학기술자의 답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엉뚱한 기사를 썼을 경우에 과학기술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고통은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다. 방송의 경우에는 더욱 심각하다. 카메라까지 들고 나타난 기자의 황당한 질문에 조심스럽게 한 답변이 머리와 꼬리는 다 잘려나가고, 본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소개되는 경험을 반복하고 싶어하는 과학기술자가 많지 않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신문과 방송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주제의 선택이다. 우리의 신문이나 방송에서 과학의 사회적 의미에 대한 기사는 대부분 과학 담당 기자의 몫이 아니고, 그 취재 대상도 대부분 현대 과학과 기술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인문사회학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과학과 기술의 사회적 의미나 현대 기술의 위험성에 대해서 의미 있는 주장을 펼 수 있는 우리의 과학기술자가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 과학기술자의 세계적 업적'에만 집착하는 신문이나 방송의 태도도 획기적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지난날 정부 주도로 신문과 방송을 장식했던 '세계 최초의 개발'이 이제는 기자의 자유로운 판단에 따른 '세계 최초의 발견'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학술지에 발표된 내용이 아무런 거름 장치 없이 일반인을 위한 선정적인 보도로 이어지는 것은 과학문화 정착은 물론이고 학문 발전에도 심각한 장애 요인이 된다.

      3) 출판

      출판은 일반인들이 결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과학의 본질을 깊이 있게 알아낼 수 있는 매우 효율적인 매체이다. 최근에 과학 분야의 출판이 상당히 활성화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유능한 전문 과학 저술가를 찾아보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 우리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더욱이 극소수에 불과한 우리의 과학 저술가들도 아직은 자신의 전문 분야를 폭넓게 소개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고, 단순한 내용의 수필을 발표하는 수준에 있다. 다만 초중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월간지가 비교적 성공적으로 발간되고 있는 것이 다행이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 전문 잡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일반인을 위한 과학 잡지는 단순히 과학과 기술의 성과를 소개하는 내용이 아니라, 현대 과학과 기술의 사회적, 철학적 영향에 대한 깊이 있는 내용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문제는 양측의 주장을 공정한 입장에서 설명해줄 수 있는 글을 집필할 수 있는 전문가를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다.
      비록 생물과 물리 분야에 집중되어 있기는 하지만 외국의 고급 과학 도서들이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과거보다는 번역의 수준이 많이 향상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크게 개선되어야만 할 것이다.

      4) 강연과 토론

      학생이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과 토론도 중요한 과학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다. 우리의 경우에는 몇몇 인기 강연자들이 발굴되어 있지만, 아직도 절대수는 크게 부족한 형편이고, 그 수준도 다양화되어야만 한다. 한국과학문화재단의 '사이언스앰버서더'가 좋은 시도이지만, 아직 그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충분히 개발되지는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일방적인 강연보다 더울 절실한 것은 과학적 주제에 대한 공개적인 토론 프로그램의 개발이다. 핵폐기장 문제나 생명 윤리처럼 사회적으로 첨예하게 대립되는 주제를 놓고 격론을 벌이기보다는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이해'처럼 차분하게 자신의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토론의 마당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4. 과학커뮤니케이션의 과제

      과학커뮤니케이션은 일반인들에게 현대 과학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현대 기술의 위험성을 정확하게 이해하여 합리적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 과학기술계나 정부의 입장에서 일방적인 홍보를 통해 사회를 설득시키겠다는 목표는 실현 불가능한 꿈에 불과하다. 과학을 체계적으로 '교육'시켜서 국민 모두를 '기술자'로 만들겠다는 목표도 의미가 없는 것이다. 과학은 자연에서의 치열한 생존경쟁을 이겨내고, 풍요롭고 안전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필수 상식이라는 점을 인식시켜야 한다. 60억이 살고 있는 현대의 지구에서 우리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과학 지식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 방식과 최소한의 과학 상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시켜야 한다. 더욱이 반드시 위험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현대의 기술을 안전하게 활용하는 데에도 과학적 사고 방식과 과학 상식은 꼭 필요하다. 과학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지 못하면 현대의 풍요로운 민주 사회를 향유할 수 있는 민주 시민의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어야 한다. 이공계와 비이공계의 '두 문화'가 극도로 단절된 우리 사회에서는 인문사회학자들에 대한 과학 문화 보급 운동도 절실하다.

    [중앙일보, “과학으로 세상보기”, 2001년 7월 9일]

    왜 기초과학인가

      그동안 과학과 기술분야에 대한 우리 사회의 투자는 꾸준히 늘어나서 이제는 정부 예산 중 과학기술 예산이 국민총생산(GNP) 의 4.4%를 차지하게 되었다. 기초과학 분야의 연구와 인력양성 환경도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상당히 개선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초과학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높아지더니, 급기야 총체적인 위기 상황에 이르렀다고 한다.
      1970년대의 실패를 무시하고 도입했던 학부제 때문에 기초과학 분야의 학과들은 학생 확보에 비상이 걸렸고, 지난해 수능시험의 자연계열 응시자는 전체 응시자의 30%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청소년들이 미래 사회의 요구를 완전히 외면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우리 사회에 현대과학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폭넓게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기초과학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과학기술입국' 을 내세우던 1960년대부터였다. 기초과학이 경제력 창출을 위한 유용한 도구라는 주장이 불모지에 터전을 닦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이제는 그 약효가 떨어져 버렸다.
      우선 기초과학의 실용성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응용과학과의 차별성이 사라져 버렸고, 기초과학은 인문학과 구별되는 하위의 분야로 비쳐지게 되었다. 기초과학 본연의 가치가 간과되면서, 기술의 오용과 남용으로 발생한 책임까지 고스란히 떠맡는 부담까지 지게 되었다.
      그동안 믿음직한 동반자로 여겼던 응용과학마저도 생산성과 효율성을 앞세우면서 기초과학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애써 확보한 파이를 함께 나누기 싫다는 뜻이다. 서울대에서도 그런 짧은 생각 때문에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도 기초과학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가치를 인식해야 한다. 과학이 자연과 인간의 본질을 밝혀냄으로써 인류 사상의 기초를 이룩해왔다는 역사적 사실이 보다 강조돼야 한다. 미신과 신화 속에서 자연을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던 시대의 철학은 코페르니쿠스를 비롯한 과학자들의 노력으로 완전히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현대 과학을 전부 부정할 수는 없다. 더 발전된 세계관은 철학자들만의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과학사상이 정립돼야만 가능한 것이다. 과학적 소양을 갖추지 못한 인문학자도 철학을 모르는 과학자와 마찬가지로 절름발이다. 기초과학과 인문학 사이에 존재하는 장벽을 허물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초과학은 문학이나 예술과 같이 우리의 마음을 살찌우는 문화적 기능도 가지고 있다. 반(反) 과학적 정서에 젖은 문학과 예술은 맹목적인 미신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진정한 문화의 발전은 문학과 예술이 과학과 함께 어우러질 때만 가능하다.
      세계화 시대라고 하더라도 비싼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는 계속돼야만 한다. 비싼 것이라고 무조건 외면해야 할 사치품은 아니다. 과학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회에 파급되는 과학 마인드가 그 결과만큼이나 중요하고, 과학에서는 남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소득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회가 기초과학과 인문학의 참된 가치를 인식해야만 진정한 지식기반 사회가 가능하다. 기초가 없는 '미래 기술' 은 경제적으로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한낱 졸부의 치부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일보 “과학칼럼” 2004년 1월 16일]

    과학을 배워야 하는 이유

      과학이 쉽고 재미있다는 주장을 자주 듣게 되면서, 과학을 오락의 도구로 이용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생겼고, 과학 교과서도 그렇게 보이도록 바뀌었다. 물론 그런 노력이 과학을 싫어한다는 요즘 청소년들의 관심을 끄는 수단일 수는 있겠지만, 너무 지나치면 오히려 우리 사회의 진정한 과학화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과학은 오랜 인류 역사에서 지극히 최근에 이룩된 고차원의 논리적 지식 체계다. 우리가 더불어 살고 있는 자연의 실체는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고 있으며, 생명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것이 현대 과학의 본질적인 목표다. 물론 과학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기술의 원천이기도 하다. 결국 과학 지식은 엄청난 노력과 희생에 의해서 이룩된 귀중한 역사적 산물이고, 현대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그런 과학을 배우는 일이 결코 쉽고 재미있을 수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을 배우고 생활화해야 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민주화된 사회에서 과학은 과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갖춰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상식이기 때문이다.
      과학적 소양이 부족한 사회에서는 비양심적인 사이비 선동가와 기업가들이 힘을 얻게 되고, 그로 인해서 생기는 사회적 손실은 민주 사회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로 심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과학은 민주 사회에서 개인의 양심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에 과학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애써 배울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미 과학과 관련된 사회문제로 심각한 혼란을 경험해 왔다. 18년이 지나도록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 문제가 그런 경우다. 방사선의 위험성에 대해 논쟁이 많은데, 위험성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과학적 사실이어서 논쟁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서로 합의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전력을 생산하기 위한 현실적인 대안이 없다면 방폐장이 아무리 위험해도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방폐장이 안전하다는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라, 정부가 그런 위험 시설을 안전하게 관리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잘못된 의제(議題)는 정부의 권위만 떨어뜨릴 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의 선택을 대신해 줄 절대 권력자가 없는 민주 사회에서는 우리 스스로가 관련된 과학적 사실을 제대로 이해해서 그런 시설의 필요성과 정부의 안전한 관리 능력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만 한다.
      청소년에게 과학의 사회적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과학이 재미있다는 초보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흥미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자칫 과학의 본질이 왜곡되어 버리면 정말 위험하게 된다.
      그래서 과학이 어렵기는 하지만 민주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반드시 배워야 한다는 절실함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 좋아하는 것만 골라서 먹이는 겉치레 교육보다는 미래의 건강을 위해 입에 쓴 약을 제대로 먹이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래서 학생들의 선택권만을 강조하는 지금의 교육 과정이 문제가 된다.
      이제 과학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과학은 어렵기 때문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서 열심히 가르쳐야만 한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과학도 본질적인 것을 알아야만 진정한 가치를 이해하고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법이다.
    [중앙일보, “과학으로 세상보기” 2001년 11월 26일]

    신기술도 과학적이라야

      요즈음 무세제 세탁기가 화제인 모양이다. 무분별한 세제의 남용으로 수질 오염이 심각하던 터에 우리 정부에서도 NT 마크로 그 가치를 인정해준 세계 최초의 기술이라고 하니 우선은 축하할 일이다.
      모직이나 실크와 같은 약한 옷감의 경우에는 휘발성 유기 용매로 때를 녹여내는 드라이 클리닝을 쓰지만, 역시 빨래는 물로 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다양한 물질을 녹이는 화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맹물에 빨래를 담가두기만 해도 때가 잘 빠진다. 주무르거나, 비틀어서 짜거나, 두드리거나 또는 더운 물을 쓰면 더욱 좋다.
      물론 화학의 힘을 이용하면 빨래가 더 쉬워진다. 나무를 태운 재를 우려낸 잿물은 염기성이기 때문에 때가 쉽게 녹아 나온다. 오래된 소변이나 소다회 또는 양잿물이나 식초를 넣으면 빨래가 잘 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비누나 합성세제는 오염 물질을 둘러싸서 강제로 떼어내기 때문에 그 효과가 놀라울 정도다. 그러나 먹기에도 부족했던 동물성 지방이나 식물성 기름으로 만들어야 하는 비누는 귀해서 누구나 쓸 수가 없었다.
      비누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1790년 이후였고, 합성세제는 1930년대에 개발됐다. 우리나라에 비누와 합성세제가 대량으로 보급된 것도 50년대와 60년대 말부터였다. 비누와 합성세제가 값싸게 보급되면서 누구나 깨끗하고 위생적인 옷을 입을 수 있는 즐거움을 누리게 됐다. 그러나 옛날의 맹물 빨래법을 까맣게 잊어버린 사람들이 세제를 마구 쓰면서 환경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됐다. 그렇다고 다시 더러운 옷을 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무엇인가 대책은 필요하다.
      일본에서 개발했다는 무세제 세탁기는 그 원리가 명백하다. 음파와 같은 압력파이지만 우리 귀로는 들을 수 없는 20㎑ 이상의 초음파를 이용한 이 세탁기는 안경점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쓰던 세척기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우리의 무세제 세탁기는 도무지 그 작동 원리를 알 수가 없다. 광고를 보면 세탁기의 기계적 성능보다는 세탁수가 핵심인 모양이다.
      탄산나트륨(소다회)을 전해질로 써서 전기분해한 물을 이용한다면 화학적으로는 소다회나 가성소다를 녹인 것과 마찬가지로 짐작이 된다. 그렇다면 굳이 복잡한 장치를 쓸 필요도 없고, 신기술이라고 자랑할 이유도 없다.
      정부에서도 인증을 해주었다니 다른 무슨 비밀이 숨겨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당치도 않은 '양전자'와 '플라즈마'를 거론하는 개발자의 설명은 오히려 의혹만 키울 뿐이다. 진짜 신기술과 엉터리 기술의 차이는 종이 한 장에 불과하다. 똑같은 회사가 엉터리 육각수 냉장고로 우리를 우롱했던 적도 있으니 말이다. TV를 통한 실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러 요인으로 결정되는 세탁기의 성능을 엉성하게 비교하는 대신 신비하다는 물의 정체를 밝혔어야 한다.
      세계 최초와 환경 친화적이라는 미사여구만으로 신기술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세탁기를 만드는 기술은 보호돼야 하지만, 신비하다는 세탁수의 정체는 비밀일 수가 없다. 정부도 무엇을 근거로 NT 마크를 주었는지 확실하게 밝혀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근거도 밝히지 못하는 '신기술'을 마구 인증해 주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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